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츠 슈베르트 (문단 편집) === 음악가가 된 이후 === 당시 오스트리아 법은 [[징병제]]였기 때문에 일정 연령이 된 남성은 의무적으로 [[군대]]를 가야 했다.[* 오스트리아는 현재도 징병제를 유지하는 국가이다.] 당시 슈베르트는 군대에 가는 게 교사가 되는 것보다 더 싫었는데, 이를 한 방에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손쉬운 방법은 학교 선생이 되는 것뿐이었다[* [[사범학교]] 학생과 [[교사]]들은 특별히 [[병역면제]]였다.]. [[음악]] 쪽으로 진로를 삼고 싶었던 슈베르트는 학교 선생이라는 직업이 내키지 않았으나, 군대만큼은 죽어도 가고 싶지 않아서 결국 17세 때이던 1814년, 아버지의 초등학교에서 조교사로 일하면서 저학년의 수업을 담당했다. 이 해에 슈베르트 최초로 발표된 큰 작품인 F장조의 [[레퀴엠|장례미사곡]]을 작곡했는데, 이때 독창을 맡았던 한 살 아래의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와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은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결실을 맺지 못했다[* 반대의 이유는 슈베르트가 경제력이 없다는 것.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이유는 사실이었다. 이후 테레제는 베르그만이란 부유한 빵집 주인에게 시집을 가고 말았다. 후일 슈베르트는 그의 일기에서 '테레제 부모의 반대로 나의 마음은 극도로 상했다. 지금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지만 아직도 나는 그녀를 사랑해. 그 후 테레제와 같이 나를 기쁘게 해주는 여자는 만날 수 없었다'라고 적어 실연으로 인한 상심을 나타냈다.].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다수의 [[가곡]]들을 작곡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시를 기반으로 한 유명한 가곡 '실을 잣는 그레트헨', '[[마왕(음악)|마왕]]' 등이 작곡되었다. 특히 마왕을 작곡할 때 집중력이 아주 대단했는데, 한밤중에 2층에서 슈베르트가 마왕에 나오는 대사[* "아버지! 마왕이 나를 잡으러 쫓아오고 있어요!"]를 연극조로 외치자 깜짝 놀란 부모님이 뛰어올라왔다가 작곡 중이란 사실을 알아차린 적도 있었고, 심지어 친구들이 와서 슈베르트에게 인사할 때 그들이 자기 바로 옆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갑자기 필을 받아 악보에 작곡을 하고 이 선율을 본 친구들이 아주 좋다고 외친 후에야 슈베르트는 그들을 알아보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걸 연주하는 사람들은 마왕을 상대하는 기분을 느끼게 된다. 이유는 자비없이 계속되는 오른손 옥타브 연타 때문. 이 연타를 편법 없이 제대로 칠 수 있는 피아니스트는 정말 드물다. 슈베르트 본인도 이걸 쳐보라는 친구의 말에 '악마한테나 시켜봐'라고 했다고...] 이듬해인 1815년에는 무려 145개의 가곡과 2개의 교향곡 등 많은 작품을 작곡했지만 소수의 친구들 말고는 아는 이가 없었다. 그나마 친구들과 연주모임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를 조직하여 활동한 것이 그에겐 즐거움이었다. 얼마 되지 않던 친구들은 죽을 때까지 그와 친했고 서로를 아꼈으며 도움을 주고 받았다. 쇼버와 슈빈트를 비롯하여 법률가 요제프 폰 슈파운(1788 ~ 1865), 법률을 전공한 [[시인(문학)|시인]] 요한 마일호퍼(1787 ~ 1836), [[화가]] 레오폴트 쿠펠비저(1796 ~ 1862), [[극작가]] 에두아르트 폰 바우에른펠트(1802 ~ 1890), [[작곡가]] 안젤름 휘텐브렌너(1794 ~ 1868), 그리고 친구가 아닌 아버지 또래이지만 그를 후원하던 [[성악가]] 미하엘 포글(1768 ~ 1840) 같이 죄다 살아생전 인정받던 예술가들이 많았다.[* 49살에 죽은 마일호퍼 빼고 다들 당시 [[평균 수명]]을 넘는 장수를 누렸는데, 그나마 일찍 죽은 마일호퍼조차도 오스트리아 황실에 반항하며 공화파 활동을 하다가 경찰에 잡히게 되자 스스로 음독자살한 것이었다.] 19살이던 1816년, 초등학교 교사 일에 신물이 난 슈베르트는 마침 [[류블랴나|라이바흐]]의 초등교원양성학교에 음악교사 자리가 비자 그 자리에 들어가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친구 슈파운이 몇 개의 가곡을 출판할 것을 제안하고 그중에 [[요한 볼프강 폰 괴테|괴테]]의 시를 바탕으로 한 작품 몇 개를 추려서 괴테에게 보낼 것을 제안하자 슈베르트는 고심 끝에 승낙했다. 하지만 괴테는 슈베르트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악보를 되돌려보내자 슈베르트는 실망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작곡은 계속되어서 가곡 '방랑자', '자장가' 등이 작곡되었다. 결국 슈베르트는 아버지와의 대립으로 교사 생활을 그만두고 빈으로 나와서 친구인 프란츠 폰 쇼버(1798 ~ 1882)와 함께 살면서 작곡에 열중했다가 쇼버의 동생이 외국에서 돌아오자 다시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1818년, 헝가리의 에스테르하지 가문에서 여름 동안 음악 가정교사를 구했는데, 슈베르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음악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그 일을 계기로 슈베르트는 고향집을 완전히 떠나 개인 레슨을 하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나그네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23년,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처녀'를 작곡했고 가곡 '방랑자'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피아노용으로 작곡한 '방랑자 환상곡'을 내놓기도 했다. 1827년, 슈베르트는 경제적 어려움과 인정받지 못하는 불우함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를 작곡했다. 이 해에 그는 평소 가장 존경하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베토벤]]이 죽기 1주일 전 짧은 만남을 가졌다. 이때 자신이 작곡한 작품 중 몇 곡의 악보를 베토벤에게 소개하자 베토벤은 그의 음악에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슈베르트는 자신의 우상이 병들고 초라해진 모습에 더일찍 베토벤을 만나러 오지 못한것을 많이 후회해 작별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베토벤과의 만남을 끝내고 말았다. 이 만남에 대한 에피소드는 베토벤 항목에도 소개되어 있다. 바로 1주일뒤에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자 슈베르트는 크게 슬퍼했고, 베토벤의 관을 운구하는 음악가들 중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한편 베토벤 사후 슈베르트의 음악가로의 진로를 반대하며 학교 교사를 강제로 시키려던 아버지와 슈베르트의 관계도 마침내 개선되었다. 집안의 형제들과 슈베르트의 주변 친구들이 슈베르트가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칠 무렵 슈베르트의 아버지를 설득하자, 아버지는 아들이 작곡가가 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꾸고 아들을 용서하면서 마침내 두 부자간의 화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화해도 잠시, 슈베르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고, 형과 함께 [[시골]]로 내려가 요양 치료를 받았다. 병명은 티푸스, 매독, 식중독 등 설들이 다양한데, 확실히 밝혀진 건 없다. 그 뒤 슈베르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말년에 슈베르트는 [[헨델]]의 '[[메시아(오라토리오)|메시아]]'의 악보를 구해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죽기 불과 1년 전에야 [[피아노]]를 장만했다. 다시 말해서 이전까지는 피아노도 없이 작곡을 했다는 얘기. 이것을 두고 악기를 전혀 연주해 보지 않고 '머리에서 떠오르는 대로 쓴 것'으로 여기기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다른 악기인 [[기타]]를 갖고 있었고, 이걸로 악상을 연주해 가며 작곡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